1994.6 | [저널초점]
우리 삶, 우리문화/입거리
아내는 입히면서 나는 안 입는다
새내공방(2003-09-23 15:37:05)
개량한복(改量韓服)이라는 말을 하는데, 묻고 싶다. 개량양복(改量洋服)이라는 말이 있는지.
개량한복이란 한자어가 일본어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아서 싫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글자그대로 한복을 좋게 고쳤다는 뜻일 텐데 사실 그 말의 의미가 왜곡되어 우리 옷 모양을 조금 바꾸고 서양 옷 모양을 적당히 배합해서 시각적인 효과만을 노린 상업자본의 용어로 전락되어 있다.
정작 한복이 개량할 점은 따로 있는데 그 이야기는 조금 후로 미루고 한복이란 이름 대신 '우리 옷'이라 바꿔 쓰면서 한복 선으로(깃, 섶, 배래, 도현, 주름)나타나는 모양새의 아름다움과 넉넉함이나 푸근함으로 표현하는 정서적 미학에 관해서는 새삼 말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우리 옷을 만드는 사람이기에 작업과정에서 물건으로 대신하겠고 다만 우리 옷을 만들면서 느꼈던 고민을 재떨이에 꽁초 터는 심정으로 털어놓는다.
하나.
이제 우리는 우리 옷을 대하는 태도, 생각부터 고쳐야 한다. 우리 옷 입는 것을 어색하거나 추석, 설날에나 입는 옷쯤으로 인식하는 풍토에서 우리 옷이 거리에서, 일터에서 그 좋은 모습으로 살아 숨쉬는 풍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옷만 입자는 고집은 아니다. 양복(남, 녀옷)도 우리네 정서, 체형에 알맞게 편히 입으면 나무랄 것이 없는데 유행과 개성이란 빌미로 터무니없이 활개 치는 요즈음 풍속이 너무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선생님이 우리 옷을 입고 행사장, 직장에 나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부인은 입히면서(?)말이다.
남자는 양복만 입고 여자는 한복도 입을 수 있다는 오늘날의 태세를 우리는 무엇으로 설명하고 후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둘.
우리 옷을 입지 않는 이유로 우리 옷이 불편하다고들 하는데, 생각해 보라. 처음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맬 때를, 미니스커트, 굽 높은 신발에 익숙해지려 수고했던 기억이 있다면 우리 옷을 입지 않으니 우리 옷을 일을 줄 (방법)모르고, 우리 옷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불편해서 안 입은 것인지 입는 방법을 몰라서 불편해 하는지는 어찌어찌 따지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유행과 패션을 이야기하면서 키 타령을 하는데, 우리네 체형은 제 아무리 키가 크고 허리가 잘록해도 몸에 비례하여 머리 크고, 손발이 짧은 것은 어쩔 수가 없음이다.
상하의 기준이 사타구니인 서양 옷이, 허리를 기준으로 하는 우리네 체형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간혹 양복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역시 서양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 더 어울린다고 시샘할, 드러낼 일이 아니다.
우리네 체형엔 서양 옷이 어울리지 않으니 어색하고, 오히려 불편할 옷이다. 그 어색하고 불편함에 익숙하고, 익숙해지려 할뿐이다. 불편한 것도 익숙해지면 편하게 느껴지는 반복과 연습을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네 모습이다.
셋.
서양옷의 길이가 짧아지고 길어지고 다양하게 변형되는 것은 유행이란 말로 자연스레 받아 들이면서 우리 옷에 대해서는 무작정 고수하고 정형화시키려는 보수 반동적 사고 때문에 우리 옷이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지 못하고 서양집 모양의 박물관이나 TV세트대용물 뿐인 민속촌에 껍데기로 모셔져 있는 현실이다. 생활 속에 반영되지 않는 우리 것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닌 것이다.
어느 나라건 관혼상제의 예복을 제외하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게 옷이다. 우리 옷도 예외는 아니다. 마치 우리 옷은 모양새가 정해져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 옷은 조선시대까지 다양하게 변해 오다 일제 식민지 이후로 우리 옷의 맥이 끊어졌을 뿐이다.
예를 들면, 한복을 한복지(옷감)로만 만들어야 하고, 저고리 조끼 마고자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어야만 한다는 데, 도대체 우리 옷을 만드는 옷감이 예전에는 따로 있었으며 조끼라는 옷은 언제부터 입었던 옷인가. 일옷 나들이옷 기능에 따라 알맞은 옷감으로 만들면 된다.
바지저고리만으로도 충분히 입을 수 있게 만들고, 치마 마고자 두루마기 등 다양한 모양새의 전승 작업이 있어야 한다.
요즈음 말 많은 웨딩드레스가 그렇다. 선녀를 꿈꾸지 않고 신데렐라를 환영하지 환상 하는 시대 의식도 문제지만, 우리 옷으로도 얼마든지 혼례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입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절실하다. 일상 중에서 우리 옷이 생활화되지 못하는 큰 이유가 일옷으로서 마땅하지 않다는 점인데 그 문제는 간단하다. 편안하게 만들면 된다.
어떤 옷이건 나들이옷은 맵시 나는 옷감으로 모양새에 치중해 만들기 마련이어서 편안한 옷이 못되고 또 입는 사람도 불편함을 감수한다. 그러면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우리 옷(한복)이야말로 나들이옷으로는 어느 것에 손색없는데, 문제는 바쁘고 복잡한 현대 사회생활에서 일옷과 나들이옷을 겸할 수 있는 평상복으로 마땅한 우리 옷이 없다는데 있다.
우리 옷뿐만 아니라 어떤 옷이건 좋은 옷의 기준은 "값싸고 편안하며 보기 좋아야 한다"라고 한다면 우리옷의 옷감을 자연 섬유류에서 세탁, 손질이 수월한 하성섬유 그러니까 어떤 옷감이든 우리옷의 재료가 되어서 다양한 기능의 생활 옷을 선보여야 한다.
넷.
우리 옷이 비싸다고 한다.
그렇다. 분명히 비싸긴 하다. 수십만 원 이상하는 양복과 비교하면서 한번 장만하면 유행을 타지 않는다는 등으로 변명하지 않겠다.
수용 공급의 싸이클에 가격이 결정된다면 양복에 비해 수요도, 공급도 형편없이 적기 때문이다. 우리 옷은 손바느질로 만드는 나들이옷이 대부분이며 또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는 소비자, 생산자 모두의 관성, 타성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돈 많은 이들이 외국 상표를 사와서 그 나라 옷 베끼기에 급급할 뿐 우리 옷을 생산성 있게 만들지 않는 탓도 대단히 크다.
왜 우리 옷은 손바느질로만 만들어야 하며 맞춤옷으로만 유통되는가.
우리 옷이 손바느질의 맞춤옷에서 양복처럼 다양한 치수, 가격대의 기성복으로 백화점에 진열되기 전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 21세기를 거론하면서 개방과 미래를 외치는 문민정부에는 아직 기대하지 않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사족 같은 표어만 남발할 뿐 정작 준비는 하지 않기에, 그러나 답답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아직 빵 먹지 않고 밥 먹고 산다. 문화와 정서라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생겨나고 저녁나절에 없어지는가.
오래전 일이다. 이름은 잊었는데 종로에서 만났던 불란서 사람이 문득 생각난다. 문화와 정서, 뭐 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가"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당신네 옷이라 말하기엔 역설적인 면이 많다. 도대체 몇 명이나 당신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가"
비꼬는 건지 격려하는 것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람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