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6 | [문화칼럼]
참다운 토양은 대중의 삶에 있다.
민족예술운동의 전망과 과제
정희섭 민예총 정책실장(2003-09-23 15:33:06)
우리 사회의 진보적 문예운동은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카프를 중심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 해방 직후의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민족문예운동의 전통이 한국전쟁 이후 분단고착화의 과정과 함께 일단의 단절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단절 현상은 이후 60년대 중반에 전개된 한일협정반대투쟁을 계기로 서서히 회복의 과정을 밟아가게 됩니다. 분단시대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함께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4.19에서 제기된 바 있는 민주주의 의식 또한 그 이념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시민 문학론」의 연속선상에서의 민족문학론이나 민족문화에 대한 탐색의 연장으로서의 「탈춤부흥운동」등이 70년대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70년대 말에 이르면 제3세계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함께 민중문예, 민중문화에 진보적 문예운동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공장이나 농촌에서의 현장문예활동이 시작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80년대에 들어 더욱 확대되고 심화되어 나타납니다. 84년에 조직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비롯하여 각 지역에 건설된 문예운동 단체들의 활동이 대부분이 민중 문예의 건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농촌 지역에 강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계급 적대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함께 노동자 계급의 문예를 민중문예의 중심에 두고자 하는 경향이 강화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87년 칠팔구투쟁 이후 대대적으로 공장지역에서의 노동자문화예술활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된 것은 그 두드러진 성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간의 진보적 문예운동은, 한편으로 근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 서구 중심적 근대가 갖는 제반 모순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결합되어, 근대의 완성과 탈근대의 전망 개척이라는 다소 모순 되어 보이는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방향에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근대사가 자주적인 근대화를 거치지 못하고, 식민지에서 신 식민주의에 이르는 외세의 절대적 영향 하에서 전개된 데서 오늘 「파행성 극복의 역사」라는 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민족예술운동이 그동안 견지해왔던 것은 전통민중문화가 그랬듯이 대중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전통민중문화와 그 토대에 주목했던 것은 결코 낭만적 복고나 국수적 고집 또는 반지성주의적 자생적 의존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설 때만이 근대와 탈근대, 국제화와 지역화라는 모순 되어 보이는 이중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와 전망을 확보할 수 있음을 그간의 실천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내적으로는 김영삼 정부의 등장으로 국제적으로는 냉전체제의 와해이후 신보수주의적 국제질서가 형성되면서 국내적 지배지형의 변화와 이념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비록 북한 핵 문제가 장애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민족 통일의 전망이 뚜렷이 보이는 가운데 김영삼 정부가 주도하는 개혁 작업은 많은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그들의 개혁 작업에 민주화운동 세력의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모사고 오히려 보수 언론과 재벌세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수구세력이 독점해온 지배지형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올바른 민주개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신 국제질서가 강요하는 개방 압력과 북한 핵 문제를 빌미로 삼는 미국 군수자본의 공세에 대항하여 민족의 이익을 지키고 자주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경제의 회복과 국제경쟁력 확보라는 현실적 필요성을 교묘히 활용하여 그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으려는 의도조차 엿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수구세력은 여전히 냉전적 논리로 진보세력의 확산을 지지하고자 반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오로지 현 정권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민중운동 세력은 그동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자기를 혁신하여 한편으로는 김영삼 정부의 주도아래 진행된 개혁 작업을 좀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신 국제질서에 대응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며 마지막으로는 민족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 실질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통해 이제 대항운동권에서 국민적 대안세력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민예총은 작년에 사단법인체로 변신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대안세력이 될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변화는 물론 그동안의 민족예술운동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변화된 상황에 주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시도였고 지금에 와서 판단하건대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예운동 역사 자체가 철저하게 제도권의 밖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의 문예운동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민족적 과제. 민주적 과제, 민중적 과제의 틀 안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온 것을 생각하면 보기에 따라서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많겠습니다만 90년대의 달라진 문화이형 하에서 그간 형성된 문예운동의 역량을 결집하여 제도권 내로 진입함으로써 보다 확장된 활동력과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거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진보적 문예운동의 제도권에의 매몰이 아니라, 제도권 바깥의 대중의 현장에서부터 제도권 안 깊숙이까지 이어지는 다층적 운동공간의 확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문예운동이 민족민주운동의 제과제와 직결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는데서 나아가, 우리 시대의 예술문화의 지배적인 흐름으로 성장해 가기 위한 출발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대체로 고급예술과 대중예술로 이분되어 있는 지배예술 문화의 구조에 민중문예의 위치를 확보하여, 우리 사회 예술문화 전체의 구조 변혁을 꾀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제도권 밖에서 지배문화에 대한 대항문화로서의 민중문예를 가꿔오던 방식을 전환하여, 지배문화의 구조 속에 민중문예의 성과를 이식하고, 이를 기초로 지배문화가 지니고 있는 반민중성, 비민주성, 반민족성을 순화해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민중문예가 지니고 있는 민중적, 민주적, 민족적 이념 및 미학을 기초로 전개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민예총은 작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위의 많은 도움에 힘입어 정력적으로 사업을 추진해왔습니다. 사업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우리를 무엇보다 고무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어려운 속에서 활동하면서 획득한 잠재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과 그를 바탕으로 우리가 노력하면 어떠한 사업도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욕을 갖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현장대중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제도권 문화행사의장에 이르기까지, 민중운동의 현장에서부터 시민단체의 행사장에 이르기까지 운동공간의 대폭적 확장이라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활동과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봅니다.
동학농민혁명백주년을 맞는 94년과 민족해방 50주년을 맞는 95년에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그간 진보적 문예운동이 가꾸어 온 문예적 성과들을 대중적으로 공유하여 대중적 지반을 굳히는 한편 냉정한 평가를 받아 달라진 문화지형에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과에 자족할 것이 아니라 좀더 많은 일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먼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민예총은 정부로 하여금 문화개혁을 철저히 하도록 하는데 좀더 노력하지 못하였으며 적극적으로 문화개혁을 주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 점점 퍼져가고 있는 불건강한 문화들을 정화시키는 데에도 힘을 쏟지 못했습니다. 특히 대중매체를 통해 만연되고 있는 불건강한 대중문화와 예술계의 혼란 상황에 맞서 건강한 문화예술의 전범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많은 책임이 있다 하겠습니다. 또 우리는 일반 생활인들이 건강한 문화를 향유하고 자발적인 문화활동을 하도록 지원 하는데에 좀더 많은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자라나는 아동과 청소년들의 문화 예술적 소양을 올바로 발현시키고 제도교육의 문화예술교육의 문제들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도 절실합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래문화에 대항하여 그리고 국제적 개방화추세에 대응하여 민족예술이 국제경쟁력을 갖추어 세계로 진출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합니다. 특히 올바른 통일을 실질적으로 성취시키는데에 문화예술이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많은 일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외적인 사업과 더불어 민족예술인 대중의 권익을 실현하며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에도 이제는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한편 이러한 일들과 더불어 우리가 진보적인 개혁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민족예술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진보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에도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야 할 필요성이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도 염주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역 대중의 삶과 밀착하여 활동해온 문화 운동체들이 민예총 지역조직의 형태로 결집을 모색하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입니다. 민예총은 서울-비장, 중앙과 지부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민족예술의 참다운 토양이 대중의 삶에 있으므로 지역단위 활동을 통해 총체적 민족예술의 활성화를 위해 지역조직을 적극 권장하고 지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