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5 | [서평]
갑오년의 함성을 다시 듣는다
『녹두장군』(송기숙, 창작과 비평사, 1994)
정철성 편집위원(2003-09-23 15:19:28)
송기숙의 『녹두장군』이 모두 나왔다. 3부가 나온 지 삼년 만에 4,5부 다섯 권이 한꺼번에 나와 저부 열두 권이 한 묶음으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소설의 끝마무리가 쉽지 아니한 까닭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짐작을 하기도 했지만 그동안 기다리면서 서운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완간된 것을 보니 그동안의 기다림이 수고랄 것도 없는 일이 되었다.
동학동민혁명백주년기념행사가 한창인 올해 서둘러 전편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회가 또다시 새로웠으니 말이다.
소설은 허구의 기록이라고 한다. 지어낸 이야기인 만큼 소설은 사실이 아니고 따라서 현실과 혼동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문학이론의 기초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순 거짓말이 소설이고 소설가는 허튼 소리나 지껄여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존재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어낸 이야기가 사실보다 더 감동적이라고 말한다. 이는 소설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표현이며 현실이 곧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이다. 거짓말이 사실보다 진실하다는 역설을 문학이론은 소설이 거짓의 기록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일의 기록이며 이런 개연성 덕분에 현실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역사소설의 위치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인 소설과 달리 역사적인 사건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역사소설은 사실의 기록이다. 실제로 『녹두장군』은 남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 작가 자신의 고증을 담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의 역사이면서도 묻혀있는 사실이 많을 수밖에 없는 한국 근대현대사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제의 기포장소가 무장이라는 사실은 조병갑과 만석보 때문에 일어난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계기였음에 틀림없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또 운봉과 같은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도지 못했음은 농민군의 세력이 전라도 내에서도 한계를 가졌으며 봉건지주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역사소설이 반드시 사실의 기록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녹두장군』의 인물들은 세 부류로 나누어 청, 일의 외세와 조정, 관료, 양반, 유생, 지주, 아전 등의 지배층, 그리고 봉기하는 농민들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거의 실존 인물로 채워진다. 세 번째 부류에서 지도부에 속하는 인물들도 거의가 실존인물이다. 그렇지만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농민군 대부분과 그들의 처자권속들은 작가의 상상력이 되살려낸 이름들이다. 삼례집회의 "이름과거"에서 장원, 차상, 치하에 뽑힌 어아니리요, 땅쏘내기, 고두쇠를 비롯하여 나중에 한자 세치 황톳물 먹인 베로 이마를 동이고 여섯 자 대창 들고 나온 수많은 농민군들, 이름조차 잊혀져 작가가 붙인 이름으로 그대로 등장하는 그들이야 말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들 농군들이 모이기만 하면 풀어내는 "익살과 청승"은 『녹두장군』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판소리의 사설을 닮은 이들의 해학은 분노를 날카롭게 세워 삶의 원칙을 쪼아낸다. 판소리의 어법이 성립한 시기가 십구 세기 말이라 하니 바로 이 말투가 판소리를 탄생시킨 바탕일 것이다. 때로는 우리는 「춘향전」과 「흥보가」의 권선징악을 저급하게 취급하는 경행이 있다. 그러나 판소리에는 선악의 구분이 간명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당시사회의 절박한 건강성이 베어 있다. 그것은 희망의 기록이다. 그 결말이 그토록 후련하게 느껴지는 것이 삶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녹두장군」에는 이런 후련함이 막혀있다. 패배한 전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이 전투의 승패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설사 전쟁에 졌다 하더라도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그 과정은 민족의 구성원에게 승리의 기억으로 전승될 수 있다. 농민군이 내세운 척양척왜와 제폭구민의 가치는 반외세, 반봉건의 구호였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성취이다. 민족이 자신을 하나의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의 접촉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한국의 근대현대사에서는 민족의 실체가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기라고 한다. 이때 제기되었던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는 분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는 그 역사를 공동의 체험으로 간직하는 구성원들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다. 역사를 완벽하게 재구성하는 것은 과거를 다시 살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언어의 재현 가능성이 무너진 현재의 언어관에 의하면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반영하는 일도 불가능이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해석을 역사로 간직하게 될 거시고 해석의 틀이 올바른가를 물을 것이다.
『녹두장군』은 전봉준의 일대기도 아니다. 『녹두장군』에서는 혁명의 진행에 달주와 경옥, 유월례와 만득이 부부, 연엽의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따로따로 하나의 구성을 이루면서 본 줄거리와 연결되는 이 이야기들이 주변 줄거리들을 이루어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소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사건의 중심에 있고 비범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녹두장군』에 나오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탁월한 지도력과 인간적 호소력이 인물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지 당대 민중의 기원의 투영인지는 분명치 않다. 전봉준이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은 북접이나 김개남과의 갈등이 아니라 "양총과 화승총"의 차이였고 이는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묘사되어 있다. 연엽의 이야기는 전봉준의 성격에 인간적인 분위기를 가미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연엽과 멀어지면 전봉준을 곧바로 백마를 탄 위대한 장군으로 높이 선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달주와(유월례와 만득이의아들인)미륵이와 인엽이를 살려 등장시키고 있다.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그들이 쉽게 죽임을 당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작품의 추이와 독자의 기대를 모두 벗어난다. 그들은 어디서 살아남았을까? 그들이 살아남은 자리에 동학 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의 의기가 전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