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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5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올란도』, 해방으로의 여행
여성문학연구모임(2003-09-23 12:13:33)
참으로 '어려운 영화'였다. 40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은 거의 의상의 변화 또는 표현주의 기법을 이용한 주위환경이나 조명의 변화로 인지할 수밖에 없고, 또 올란도의 의식의 변하도 거의 설명해 주지 않는다. -'올란도'는 시종 의식의 흐름만을(말 그대로)'보여주고'있을 뿐이다. 영화는 특이하게 7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 사랑, 시, 정치, 사교계, 성(sex),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7개의 테마는 먼저 보편적 인간의 삶을 유형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죽음-탄생에 이르는 이 과정은 올란도의 의식과 성장과정, 즉 통과의례의 과정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죽음의 테마에서 올란도는 피보호자의 신분에서 완전한 사회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마지막 탄생의 테마에서는 사회적 존재로서 남성 혹은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올란도로 다시 한번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올란도'는 어려운 영화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이 원작의 난해성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독의 표현상의 문제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때문에 영화에 대한 나름대로 시각을 개진하기 전에 올란도를 바라보는 시각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올란도의 한국어판 출판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관계로 원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영화가 원작에 충실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더라도 여성감독(셀리 포터)과 원작자(버지니아 울프)사이의 시대적인 변화, 의식의 변화 등을 고려해 볼 때 과연 감독이 버지니아 울프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냈는가? 나아가 제대로 읽었다면 그것을 현대적 의미의 여성해방으로 재구성해내었을 때 영화적 형상화에 성공했는가 하는 문제까지 대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제한하여 '올란도'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 결국 이 글의 목적은 올란도라는 틀을 이용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소개가 될 것이다. 올란도는 17세기 영국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 아름다움과 순수성으로 인해 '영원히 시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축복(?)을 받고 불사신이 되던. 영화는 죽음의 테마로 시작한다. 영화 내에서의 죽음은 올란도를 사랑하고 보살펴주던 여왕과 아버지의 죽음이다. 여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올란도는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즉 지위와 재산을 상속함)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하나의 인간이 된 올란도는 사랑, 시 정치의 테마에서 남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젊은 귀족 남성 올란도는 아무런 제약 없이 사랑하고, 예술을 공부하고 정치에 뛰어든다. 그러나 올란도에게는 예술에 대한 재능도 없고 정치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공리에 자신의 일을 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단지 남성이며, 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에 환멸을 느끼고, 예수도 포기하고 또 정치의 비인간성을 체험한 올란도는 19세가 영국의 귀족 아가씨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남성인 올란도에게 없었던 많은 제약들이 여성인 올란도에게는 굴레가 되어 나타난다. 사교계에 진출한 올란도, 그러나 그곳의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예술 속에서도 여성을 찬미하고 숭배하던 남성들이 현실의 여성들은 아무런 생각도 할 줄 모르는 한낮 장식품에 불과한 존재로 여기고 있음을 깨달은 올란도는 절망한다. 더욱이 아무리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여성에게는 지위를 계승할 자격도,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올란도. 그 시대에 의식 있는 여성들은 평생 손가락질을 받다가 노처녀로 늙을 수밖에 없음에 절망하는 올란도의 고뇌를, 영화는 영국 정원의 끝없는 미로로 표현하고 있다. 성의 테마에서 올란도는 한 남자를 만나고, 그 남자로 인해 육체적인 성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남자는 올란도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자유를 찾아 끝없는 방랑의 길을 떠난다. 결국 19세기 말에도 여성은 끝없이 남자를 기다리는 존재, 남성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한 존재, 즉 장식적인 존재에 불과함을 나타내 주고 있다. 19세기를 살아가는 올란도에게 있어서도 지위의 계승이나 재산의 상속권은 여전히 부여되지 않고 있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난 후에 올란도는 임신을 하게 되고 임신의 기간은 전쟁의 상황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묘사는 시간의 흐름 혹은 시대적 정황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에게 있어 임신은 전쟁과 같은 고통의 체험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임신과 출산을 여성해방의 장애가 되는 것으로 보고 있는 19세기 페미니즘의 견해와 일치하고 있다. 탄생의 테마에서 올란도는 20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한 아이의 어머니이고 전문적인 직업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는 그녀에게 지휘의 계승이나 재산의 상속을 제한하고 있다. 작가로서, 한 아이의 어머니인 올란도는 400년의 긴 여행 끝에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 즉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굴레, 즉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구분해 놓고 사회가 부여해놓은 여성으로 혹은 남성으로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것에의 해방이 진정한 여성해방 나아가서는 인간해방임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논리의 전개-특히 200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경험을 경험 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도고, 한결같이 올란도의 굴레로 작용하는 것은 사회제도적 문제 즉 지위의 계승과 재산의 상속 문제였다- 는 여성억압의 기원을 자본주의 발달에서 기인한 철저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을 영·미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의 대안으로 사회 참여의 문제를 내세웠을 때 그것은 기득권자인 남성의 권리를 나눠 갖자는 의미가 되고, 결국 여성해방은 남성지향의 것, 즉 남성의 우위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지닌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올란도는 단순히 여성의 해방을 여성의 남성화로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며 여성으로서의 삶-출산과 양육의 주체로서의 삶과 기본적 남성적인 삶으로 규정되었던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양립하는 삶, 즉 양성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양성성의 추구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단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양성성을 대안으로 상정했을 때 '올란도'는 그 추론과정의 설득력이 미약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올란도는 200년을 남성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남성으로서의 올란도는 전형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17-18세기는 영국 사회의 산업화가 가속되던 시기였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의 남성의 존재가치는 외부적 조건의 충족, 즉 신분상승 또는 물질의 축척에만 부여되고 있었다. 그러나 올란도는 이러한 외부조건들이 이미 주어져 있는 상태로 시작하고 있다. 더욱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가려는 노력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여성으로서의 올란도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성 삶의 전형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에 , 남성으로서의 올란도는 전형성의 확보에 실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올란도에서 여성해방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양성성의 추구일 때, 남성전형의 모습을 묘사하지 못한 것은 작품 완성도를 훼손시키고 있다. 여성문학 연구모임 / 93년 3월부터 시작해 문학 드라마 영화 등 문화에 나타난 여성문제를 비판하고 개선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단체, 여성문제를 같이 공부하고 고민할 사람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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