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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5 | [시사의 창]
특별기고 광주의 이름으로 묻는다. 국제냐 제국이냐
유제호 전북대교수 불문학과(2003-09-23 12:11:58)
또 광주 이야기냐고, 이제 그만 잊어버리자고 하는 이들이 있다. 언제 우리가 툭 털어놓고 실컷 광주 이야기를 하긴 했단 말인가? 어떤 이들은 잊지는 말되 용서하자고 한다. 누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가? 잊지는 말되, 누가 왜 누구를 무엇에 관련하여 용서해야 하는가? 문민정부도 들어섰으니 이제 화해의 미덕을 베풀자고 하는 이들도 있다. 문민정부가 어떻게 들어섰는가? 문민정부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떤 식의 화해가 진정한 미덕인가? 광주항쟁을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을 세인들의 기억에 아예 각인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광주항쟁을 이러쿵저러쿵 오도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것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광주항쟁을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자들이 있다. 거기에 담긴 교훈이 세인들의 뇌리에 속속들이 각인되어 사방으로 파급외고 자자손손 계승될까 두려워서이다. 이런 상념, 의문, 각성과 더불어 우선 옷깃을 여문다. 1980년 5월의 현장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이들, 그 헌장을 뒤늦게나마 계승하기 위해 오래도록 몸부림친, 지금도 안간힘을 쏟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옷깃을 여며 고개 숙이고 있는 사이, 불경스럽게도, 국제화, 국가경쟁력, 무한경쟁, 발가벗은 경쟁시대 등등 제대로 여과되지 않은 어휘들이 난무하는 것을 느낀다. 그런 느낌과 더불어 광주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제(國制)냐 제국(帝國)이냐? 국제냐? 제국이냐? 이 질문이 국제화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이 대목에서 당장 분명히 해 두자. 국제화는 거스를 수 없는 것. 더없이 좋은 것이다. 예를 들어 국제사면위원회의 감시, 고발 , 경고, 조언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따금 목격하는 국경을 초월한 순애보에 질투어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서로 다른 자연환경에 놓인 국가들 간에 교역이 필요하다는 기본원리에 공감한다. 컴퓨터 망을 통한 고발 덕분에 30분 만에 세계 각지에서 항의 전화가 쇄도함으로써 소련의 한 정치범이 풀려났다는 소식에 가슴 후련하다. 특히 종교인들의 국경을 초월한 희생과 헌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인혁당사건 희생자들과 유일하게 후원했다는 죄과로 1975년에 강제 추방당한 미국인 목사 조지 오글. "정부는 서교사가 선동한다고 보지 마고 그가 있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우정어린 충고를 서슴치 않은 죄과로 역시 샅은 해에 강제 출국당한 미국인 신부 제임스 시노트, '도산(倒産)에 들어오면 도산(逃散)한다'는 못된 기업주들의 터무니없는 고자질에 대항하여, 여성근로자들의 억울한 사정을 귀담아 들어주고, 각계원로에 지원을 요청하고, 1년에 한번쯤 그 어린양들의 야유회도 따라다녀 준 죄과로 1978년 끝내 강제 출국당한 오스트레일리아 선교사 스테판 라벤더, 물을 건너오면서 까지 유신테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청껏 부르짖은 죄과로 강제 출국당한 일본인 목사 사와 마사이꼬. 그들에게 어떻게 감사하고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이른바 국제화의 배후에도 도사리고 있는 (국내외)자본, (국내의)정치권력, 특히 제국의 검은 그림자다. 자본, 권력, 특히 제국의 그림자는 정치, 군사, 경제 부분만이 아니라 때로는 노골적으로 우회적으로 일상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침투한다. 과학, 기술, 문화, 종교, 언어를 포함한 모든 부문이 제국화에 가세하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가세하기도 하고, 때론 결과적으로 가세한 셈이 되기도 한다. 국경을 초월한다는 미명아래, 국제화라는 허울 아래 이루어지는 과학기술, 문화교류, 종교 활동, 언어교육, 해외여행 등등이 제국화에 가세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제국호의 토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광주항쟁은 바로 이것을 일깨워 주었다. 광주항쟁 당시 내신기자들이 손발이 꽁꽁 묶인 반면에 적잖은 외신기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취재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5.24일자 AFP통신이 다음과 같이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 캄보디아를 능가"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속속들이 알아차렸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취재가 왜 해외에서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가? 역시 5.25일자의 한 유인물은 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애절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종교가 특수한 차이를 초월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 또 모든 국민에게 행복이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신봉하고 있다고 믿습니다."(「전국 종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그리고 5.26일자 「광주사태수습위원회 일동 대변인 김성용 신부'명의의 「추기경 각하에게 드리는 글」은 "저희는 계엄군에 의해 짐승처럼 치욕과 학살을 당하고도 폭도요 난동분자요 불순분자로 지목되었습니다"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종교는 종교인들은 왜 그토록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는가? 5월21일 이후의 시외전화 두절 사태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광주는 오래도록 외로운 섬이었다. 그런 가운데 5월25일자의 한 유인물은 시민들에게 다음 다섯 가지를 당부하고 있다. 첫째,"(...)애도합시다." 둘째(...)즉시 복구 작업을 합시다"셋째(...)염려 마시고 내일부터 생업에 종사합시다."넷째 가게 문 앞에 '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붙이고 계속해서 최후의 일각까지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신무장을 합시다" 다섯째,"서로 도웁시다" 한마디로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 공동체 의식,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소망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7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와의 회견 석상에서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대다수 한국민중은 기와집에 살면서 전기가 들어오고 직장이 있으며 밥상에 밥만 오른다면 아주 유순하고 복종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 그대로의 민주주의가 한국에 적합한지 또는 한국인이 그러한 민주주의에 적합한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다"고. "전(전두환 장군)을 선두에 세워 놓은 후열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마치 들쥐부대같이 하나의 진영을 갖추어 모여들고 있다"고. 그래서 8월8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를 인용한 8월9일자 『동아일보』는 버젓하게 『전두환 장군의 영도력, 한국민들 폭넓게 환영』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광주항쟁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자본, 권력, 제국의 시커먼 그림자 앞에서는 그 어떤 천진난만함도, 애절함도, 정당함도, 정의로움도, 형제애도, 인류애도 묵살 당하고 만다는 것을, 이른바 국제화의 성격을 띤 모든 활동, 모든 분야에 제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민중,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가 총을 들지 않고서는, 우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아무도 우리 땅, 우리의 자유,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제멋대로 난무하고 있는 국제화, 국가경쟁력, 무한경쟁, 발가벗은 경쟁시대 등등의 어휘들이 민중,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통해 적정선에서 여과되어야 한다는 것을. 광주항쟁은 예를 들어 '다국적기업'이라는 말에 은폐된 자본, 권력, 특히 제국의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다국적기업이 어떤 점에서 다국적인가? 강대국의 권력과 결탁하여 문어발식으로 뿌리를 뻗어나가는 이윤추구의 현장이 다국적기업이 아니던가. 과학기술, 문화교류, 종교 활동, 언어교육, 해외여행 등등과 맞물려 궁극적으로 약소국 국민들의 의식과 일상에 침투해 들어가는 제국화의 선봉장이 아니던가. 광주항쟁은 국내자본, 국내권력과 결탁하여 우리의 목을 죄고 있는 현실을 자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렇기에 광주의 이름으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있어 문민정부와 더불어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지고 있는가? 문민정부가 과연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 문민정부야말로 국제화, 국가경쟁력, 무한경쟁, 벌거벗은 경쟁시대라는 구호들을 통치 지배이데올로기로 약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민정부 아래 있는 우리 시대의 한국사회야말로 국제화를 빙자한 제국화가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장이 되어 있지 않는가? '한반도 전쟁 불사'라는 페리 국무장관의 발언이 자칭 불황을 겪고 있다는 무기장수들의 이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냉전 종식이라는 표면상의 세계적 공감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군비는 더욱 확대되고 페트리어트 미사일이 속속 한반도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컴퓨터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빌 게이츠는 2001년까지 840개의 위성을 쏘아 올려 아예 우주에서 지구촌을 '덮어' 버리겠다고한다.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이제 인권 보호라는 명분아래 블루라운드로 환경보호라는 명분 아래 그린라운드로 공정거래라는 명분 아래 기술라운드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강대국들이 나머지 다른 국가들의 목을 죄어들 태세다. 이러다가 별의별 명목 아래 특정 종교가 세계공용교로, 특정 문화가 세계공용어로 부과되는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그것도 강대국들이 구태여 강요하는 양상으로 아니라, 약소국들 스스로 별 수 없이 순응하는 양상으로 말이다. 그렇게 치닫다가 언젠가는, 한국이 2개여 병용사회가 되고 나아가서는 한국사회에서 한국어가 2차언어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남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자청하는 양상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한국인이 개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된장마저 먹지 못하는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겠다. 그것도 남이 금지해서가 아닐, 남의 비위를 상하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 절제하는 양상으로 말이다. 왜 이와 같은 희한한 위기의식이 드는가? 광주항쟁 당시의 피맺힌 절규가, 광주항쟁 이후 오히려 역류한 기막힌 역사가 그것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형제애도, 인류애도, 종교적 차원의 희생과 헌신도 자본과 제국의 검은 그림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광주항쟁이 자명하게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광주항쟁은 이제 단순한 기억의 대항이 아니라 투철한 계승의 대상이어야 한다. 기억은 그릇처럼 그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 기억은 색깔처럼 점차 옅어지는 속성이 있다 기억은 마치 용수철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속성이 있다. 그런 기억에 광주를 내맡겨 둘 수는 없다. 광주는 이제 우리 모두의 반성의 토대여야 한다. 그것을 구심점으로 대항 이데올로기가 형성, 파급되어야 하고, 그것을 요람 삼아 민족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 광주항쟁의 정신이 민중, 민족, 민주에 토대한 건전한 이데올로기로 내면화되어 자자손손 계승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우선 '광주'를 있는 그대로 알고 심판해야 한다. 무한경쟁의 짜릿한 쾌감을 물리치고, 한 걸음 물러서서, 국제화의 배후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똑바로 바라보라. 거기에 자본, 권력, 특히 제국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서 앞서 말한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은가? 우리 편에서의 선택의 여지라곤, 티끌만큼도 없이, 어느 한 순간 자본, 권력, 제국이 교묘하게 결탁하는 바람에, 한반도가 아수라장 쑥대밭이 되고 말리라는, 그런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은가? 끊임없이 식수(食水)가 독수(毒水)로 변하고, 공해에 찌든 울산공업단지 주변처럼 머지않아 이른바 금수강산이 아예 민둥산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 위기감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국제화. 국가경쟁력, 무한경쟁, 발가벗은 경쟁시대라는 어휘의 사용을 절제하기로 하자. 발가벗고 무한경쟁의 벌여 어쩌다는 것인가? 자멸의 길로 들어서자는 것인가? 공동자멸의 선봉에 서자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국제화의 실상을 고발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국제화라는 미명 아래 벌어지고 있는 제국화 현상을 경계하는 집단에도 주목하기로 하자.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이와 같은 위기감을 솔직하게 털어놓도록 하자. 거기에서 살짝 비켜가 있다는 점에서는 북한사회로부터 배울 점이 없지 않다는 것도 인정하기로 하자. 이런 류의 냉철한 반성과 민족 화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사상재판을 벌이지는 말기로 하자. 광주항쟁을 거울삼아 무조건적으로 국제화를 거역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교훈 삼아 맹목에 가까운 민족지상주의로 나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국제회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제국의 그림자를 견제하자는 것이다. 국제화라는 것이 그 큰 부문에 있어 강대국들의 집단이기주의 라는 점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거기에 국제 통치수단으로서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촌의 자멸을 가속화하는 한 요인이라는 점에 유의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때로는 본의 아니게 때로는 결과론적으로 거기에 휩쓸려 있다는 것을 각성하자는 것이다. 눈길을 안으로 돌려, 국제화라는 것이 국내 통치수단으로서 지배이데올로기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국제화, 국가경쟁력, 무한경쟁, 발가벗은 경쟁시대 등등 이른바 문민정부가 내걸고 있는 구호들을, 우리 모두 한 걸음 물러서서, 두고두고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국제화는 거스를 수 없는 것, 더없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족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통해 그것을 적정선에서 다스릴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그렇다. 이것을 개방적인 민주주의, 또는 민족적인 개방주의라고 할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계승해야 할 광주항쟁의 기본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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