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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5 | [문화저널]
작품과 나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의 뒷 이야기
김한수 소설가(2003-09-23 12:11:05)
내가 정옥이 엄마를 알게 된 건 우리 가족이 가리봉 고개에 있는 무당집에 세들어 살 때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꼭 칠 년 전의 일이다. 그이는 우리와 같은 집에 세 들었는데 첫눈에도 고생을 겨울외투처럼 걸치고 다니는 삼십대 중반의 아낙이었다. 가난 때문에 겪게 되는 고생으로 치자면야 가리봉에 사는 거개의 사람들이 다 그만큼씩은 하고사니 정옥이 엄마가 그저 가난한 아낙에 지나지 않았다면 나또한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을 터이다. 내가 그이의 남다른 처지를 알게된 건 그이가 무당집으로 이사 온 지 한달이 지났을 때, 가게 집주이의 입을 통해서였다. 정옥이 엄마의 남편은 노가다를 하는 사람이었다는데 키가 훤칠한 미남자였다. 얼굴값을 하느라 그랬는지 정옥이 아빠는 여자 꽤나 밝혀 이중살림을 하고 본처인 정옥이 엄마에게는 일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와 돈푼이나 뜯어가는 못난 위인이었다. 그뿐이랴면야 그저 그런대로 봐줄 수도 있으련만 사람 못난 것도 다 팔자소관인지 이 이 위인은 일주일에 한번씩 찾아올 때마다 술에 취해서 정옥이 엄마를 죽도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국민학교 졸업반인 큰아들 창석이는 집집마다 문을 두들기고 다니면서 제 엄마를 살려달라고 울고 다녔으니 차마 사람 사는 꼴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옥이 엄마가 워낙 사는데 열심이고 어지간해서는 남 앞에서 구차한 소리를 늘어놓는 법이 없어 모르는 이가 보면 가난하기는 하지만 별 근심 없이 웃고사는 아낙쯤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내가 알기로 그이는 하루에 세 구대의 지장을 다녔다. 오전에는 우유배달인가를 했고 오후에는 어디 건물청소를 했으며 저녁에는 식당에서 설거지를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들풀과도 같은 그이의 생명력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정옥이 엄마는 한달에 한두 번 꼴로 술에 취해서 자정을 넘겨 들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집에 찾아와서 내게 삼촌삼촌 해가며 신세타령을 했다. 다른 사람의 신세타령을 들어주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오죽 힘들면 나를 찾아와 저런 소리를 다 늘어놓을까 싶은 생각에 그이는 아마도 내가 소설가였기에 나를 말상대로 삼은 듯하다. 실제로 그이는 내소설을 썩 좋아했다. 나와 정옥이 엄마의 인연은 우리집이 이사를 가는 바람에 만난지 일 년 만에 끝나버렸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두해 남짓한 세월이 흐르는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정옥이 엄마를 잊었다. 가끔씩 그 비슷한 처지의 여인들을 볼 때면 정옥이 엄마가 떠오르고 아직도 그렇게 각다분하게 살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가리봉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무당집에 들여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옥이 엄마는 자궁암 말기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병문안을 가서 봤던 정옥이 엄마의 모습만 떠올리면 와싹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랬다. 정옥이 엄마는 살아있으되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산송장이라는 말을 수시로 들어보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해골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가르랑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정옥이 엄마는 움푹해진 두 눈만이 맑은 빛으로 가득해 생의 마지막 심지를 태우고 있었다. 나를 본 정옥이 엄마는 한참을 허공만 바라본 끝에 "삼촌 죽고 싶어. 하루빨리 죽고만 싶어"하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삼십분인가,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정옥이 엄마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데 정옥이 엄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삼촌 내 얘기 좀 써줘"하고 뜻밖의 부탁을 해왔다. 그런 정옥이 엄마의 눈 속에는 이 세상에 자기가 왔다갔다는 자취를 남기고 싶은 열망이 너무도 강렬하게 담겨있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언젠가 정옥이 엄마가 시집온 이후로 꼬박고박 일기를 써오고 있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혹시 그 일기를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묻자 그이는 얼마전에 다 태워버렸노라고 했다. 나는 내가 뭘 알아야 써도 쓰지 않겠느냐고 얼버무리며 그이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했다. 미안하긴 했지만 유언이나 다름없는 부탁을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정옥이 엄마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는 압박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자신의 얘기를 써달라던 정옥이 엄마의 꺼져들어가는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그렇게 고생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갈 바에야 뭐 하러 사람은 태어나고 아득바득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허무는 나를 이중으로 괴롭혔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나는 드디어 그이의 얘기를 소설로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이 세상에 태어났고 소설속의 복길네는 다름 아닌 정옥이 엄마다. 소설을 다 쓴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내 소설이 정옥이 엄마의 원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물론 딴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건 작은 위안을 줄지언정 자괴감을 가시게 할만한 변명이 도지 못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정옥이 엄마에게 두고두고 미안한 노릇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소설을 쓰고 있다. 비참하게 살다가 밝은 빛 한 번 쐬지 못하고 죽은 것이 정옥이 엄마의 삶이었듯 소설을 쓰는 것, 그건 바로 내 삶이고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김한수 / 64년 전남 장성 출신으로 88년『창작과 비평』중편소설 『성장』을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81년부터 노동자 생활을 해왔고 현재는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중단편집『봄비내리는 날』을 펴냈다. 『그 무더웠던 여름날의 꿈』은 『봄비 내리는 날』에 실려 있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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